헐리우드는 변하고 있다 (가제)



 우리는 헐리우드 대형 블록버스터 영화들 속에서 여성들이 스스로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활약하는 영화를 본 적이 몇 번이나 될까? 적어도 나의 개인적 경험을 떠올려보면 그리 많지 않다. [델마와 루이스], 디즈니의 [뮬란] 정도가 있겠지만 이들은 우리가 으레 떠올리는 ‘대형 블록버스터’는 아니었다. [에일리언] 시리즈의 리플리 정도가 있겠지만 실상은 시리즈가 거듭 될수록 에일리언을 그녀의 몸 안에 품고 그를 지키다 출산을 하는 등, 주체적인 여성으로서 활약했다기보단 또 다시 우리의 머릿속에 남은 전통적인 ‘어머니’의 모습이 되어버린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안젤리나 졸리의 [툼 레이더]가 있지 않느냐고? 흠, 영화 속 그녀의 모습과 활약은 괜찮았지만 그녀는 영화 내내 쫙 달라붙는 옷을 입고서 등장한다. 결국 남자들이 바라던 쾌활한 여성 정도에 머물렀다. 캐릭터는 좋았지만 그를 보여주는 방식은 그리 옳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등장한 블랙 위도우? 그 블랙 위도우마저도 결국 여러 남성 히어로들의 로맨스 대상 내지는 ‘갈등과 상처를 보듬어주는 인자한 여성 캐릭터’ 정도로 소비되는 중이다.

 그렇게 10여 년이 흘렀고, 우리는 여성 캐릭터가 활약하는 영화에 대한 바람조차 잊어버리게 되었을 즈음, [매드 맥스]라는 영화가 세상에 공개됐다. 각본 상의 주인공은 남자인 ‘맥스’지만, 영화를 보면 진짜 주인공은 ‘퓨리오사’라는 걸 알 수 있다. 머리를 삭발하고 지저분한 얼굴로 활약하는 여성 캐릭터, 남자 캐릭터들은 그녀가 여자라는 이유로 무시하거나 그녀의 행동에 훈수를 두지도 않고, 그녀도 애초에 그런 훈수 따위 귀담아 듣지 않는다. 심지어 신체적으로도 한 쪽 팔이 없는 장애인이다. 그러나 영화 내내 그녀가 여자라고, 장애인이라고 그것을 특별히 여기는 연출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야기의 중심이 되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모든 행동은 그녀의 의지대로 이루어지며, 퓨리오사라는 캐릭터가 없이는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는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퓨리오사라는 캐릭터에 흠뻑 빠져들었다. 이런 독립적인 여성 주연 캐릭터가 등장하는 블록버스터 영화를 본 적이 있었던가?

 그리고 같은 해 봄, [스파이]라는 영화도 개봉했다. 유능한 실력을 가지고 CIA의 요원이 되었지만, 뚱뚱한 여자라는 이유로 박쥐가 나오는 지하 사무실에서 동료 남자 요원의 후방 지원만 하던 그녀가 현장임무를 맡으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이 영화에서는 더 적극적으로 현실의 장벽을 그려낸다.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와중에도 그녀를 무시하는 남자들은 도처에 있지만, 그녀는 그에 굴하지 않고 그녀의 오랜 친구를 파트너로 삼아 활약, 임무를 성공적으로 처리한다. 물론 액션 코미디 영화지만, 오히려 그 점 때문에 더욱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잘 전달됐다. 웃음 속에는 뼈가 있었고, 영화를 보고 나면 생각하게 되는 점들이 많은 영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작의 네 남자 주인공들 대신 네 명의 여성들로 이루어진 [고스트버스터즈]가 개봉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너무도 반가운 소식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소식이 알려지자 감독과 주연 배우들에 대한 비난과 개봉도 하지 않은 영화에 대한 평점 테러가 이어졌다. 심지어 영화의 유일한 흑인 주연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 레슬리 존스는 온갖 성차별적, 여성 혐오적, 인종 차별적 댓글들로 인해 홈페이지와 트위터 계정을 잠시 폐쇄하기까지 했다. 이 모든 일들이 영화가 개봉조차 않은 상황에서 벌어졌다.

 새로운 [고스트버스터즈]가 겪은 일들은, 아직 우리가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영화를 얼마나 낯설어 하는지, 그간 보아온 남성 위주의 영화들을 단 한 번도 비판적으로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새삼 상기시켜주었다. 그동안 수많은 영화들 속에서 남성들의 활약은 이상할 것 없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여성 캐릭터들은 대부분 그저 짝사랑의 대상 내지는 성가신 ‘민폐녀’ 정도였다. 그나마 활약이라고 해봐야 웃긴 모습으로 총을 들고 뛰어다니거나 머리칼을 붙잡고 싸우며 따귀를 때리는 게 전부였다. 모든 중요한 것들은 다시 남자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막상 영화를 보니 [고스트버스터즈]는 확실히 달랐다. 성공도 실수도 그 과정 모두 온전히 그녀들의 몫이었고, 멋지게 세상을 구해낸다. 단지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별만 바뀐 것이었다. 여자들만 나오는 영화가 재미없을 것이란 사람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영화 속에서 그녀들의 활약은 흠 잡을 데 없었다. 여자들도 얼마든지 이런 걸 할 수 있다고, 너무 늦은 것 같아 그동안 답답했다고 외치는 것 같았다. 그만큼 영화는 통쾌하고 시원했다.

 조지 클루니와 브래드 피트의 [오션스 일레븐] 시리즈가 제니퍼 로렌스, 앤 해서웨이, 산드라 블록 주연의 여성 버전으로 리메이크 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년 여름에는 사상 최초 원더 우먼의 단독 장편 영화가 개봉한다. 그리고 최초로 공개된 예고편에서 원더 우먼은 남자 동료에게 단호하게 말한다. “내가 하려는 일에 당신 허락은 필요 없어요.”

 그렇다. 이렇게 헐리우드는, 세상은 변화하고 있다. 야심차게 새로운 여정을 시작한 [스타 워즈 에피소드 7 : 깨어난 포스]에서도 적들에게 쫓겨 도망칠 때 남자 동료에게 “나 혼자 달릴 수 있으니 내 손을 잡지 말라”고 외치는 여성 주인공이 등장했다. 그렇지만 아직 우리에게는 더 많은 여성 영화들이 필요하다. 여성들이 주연이라고 해서 무엇인가가 크게 다를 필요도 없다. 그저 그동안 남자들만이 보여지던 세계에, 더 많은 여성들의 더 다양한 활약을 보고 싶을 뿐이다. 앞서 말한 [고스트버스터즈]의 사례만 보더라도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혐오와 차별의 시선들이 만연해 있다. 그렇기에 나는 더 진일보한 영화들을 보고 싶다. 이런 영화들이 더 많이 개봉하고, 여성 주연의 대형 블록버스터 영화가 많이 만들어지는 것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세상이 어서 왔으면, 하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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